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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 청설 이야기
대만 타이베이, 한 여름. 대학생 **천이셩(펑위옌)**은 평범한 청년이다. 공부보다는 아르바이트와 친구들 사이에서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의 부탁으로 농인(청각장애인) 농구팀의 통역 아르바이트를 맡게 된다. 농구 시합장에서, 그는 두 명의 농인 여학생 **양양(천옌시)**과 **펑(천이지엔)**을 처음 만난다.
양양은 생기 있고 긍정적인 성격을 가진 여자아이이고, 펑은 조용하지만 단단한 존재감을 가진 소녀다. 둘은 서로의 전부라 해도 될 만큼 깊이 의지하고 살아간다. 그런데 양양에게는 마음속 깊이 간직한 고민이 있다. 펑은 가족으로도, 친구로도, 연인으로도 말할 수 없는 특별한 존재이지만, 양양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단순한 우정보다 크다는 것을 자각한다.
반면, 천이셩은 양양에게 점점 호감을 느낀다. 그녀의 웃음, 손짓, 눈빛이 하루하루 그의 마음속에 들어온다. 그러나 곧 그는 알게 된다. 양양의 마음은 펑을 향해 있다는 것을. 더불어 펑이 양양을 바라보는 감정도 단순한 우정이 아님을 눈치챈다. 말로 표현되지 않는 사랑, 들리지 않아도 가슴 깊이 느껴지는 감정들 사이에서 천이셩은 묵묵히 그들의 곁을 지킨다.
어느 날, 양양은 펑에게 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펑은, 자신이 양양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지금의 ‘우리’뿐이라며, 한 발짝 물러선다. 그날 이후, 세 사람은 각자의 마음을 안은 채 조금씩 달라진다. 천이셩은 양양에게 말없이 이별을 고하고, 양양과 펑은 서로를 지켜보며 조금씩 거리를 좁혀간다.
결국 영화는 누군가의 사랑이 꼭 소유여야만 진짜가 아니며, 말로 하지 않아도 마음은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 조용히 말해준다. 그렇게, 소리는 없지만 감정은 가득한 이들의 이야기는 여운을 남긴 채 끝을 맺는다.
2. 영화 연출, 연기
감독 청펀펀은 청설을 통해 **‘소리 없는 세계’와 ‘보이는 감정’**을 섬세하게 풀어낸다. 영화의 제목인 ‘청설(聽說)’은 문자 그대로는 ‘들리는 이야기’지만, 역설적으로 영화는 ‘들리지 않는 감정’이 얼마나 큰 울림을 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연출의 가장 큰 미덕은 ‘과장하지 않음’이다. 농인 캐릭터들을 불쌍하거나 특별한 존재로 그리지 않고, 그저 그들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청춘으로 보여준다. 이들의 대화는 대부분 수화로 이루어지며, 자막이 함께 제공되지만, 때론 자막 없이도 그들의 감정은 고스란히 전해진다. 화면에 흐르는 공기, 눈빛, 손짓 하나하나가 오히려 말보다 더 큰 이야기를 들려준다.
펑위옌은 이전 작품들보다 한층 더 섬세하고 절제된 연기를 보여준다. 다정하지만 조심스러운, 착하고 유쾌하지만 속 깊은 인물로 천이셩을 자연스럽게 표현해 낸다. 천옌시는 양양의 밝은 에너지와 내면의 갈등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특히 수화 장면에서의 표현력이 인상적이다. 그녀의 웃음 뒤에 감춰진 외로움과 혼란이 눈빛에 고스란히 담긴다.
천이지엔은 펑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말없는 깊이를 보여준다. 가장 말이 없지만, 가장 많은 감정을 안고 있는 인물이다. 그녀의 고요한 표정 하나가 수많은 대사를 대신한다.
무엇보다 영화의 배경인 여름의 타이베이 풍경이 잔잔한 감성의 배경이 된다. 햇살 가득한 거리,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골목, 축제와 시장의 소란스러움 속에서도 세 인물은 조용히 사랑을 건네고, 또 떠나보낸다. 이러한 연출은 영화를 더욱 따뜻하고 현실감 있게 만든다.
3. 청설 관람후
영화 청설은 보고 나서 한참을 멍하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이 영화가 전형적인 사랑 이야기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고백하고, 함께하고, 또는 이별하는 이야기라면 흔할 수 있다. 하지만 청설은 그 사이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말하지 못한 마음들’을 오래도록 응시하게 한다.
① 사랑은 결국, 바라보는 일
이 영화에서 가장 큰 울림을 준 것은 천이셩의 존재다. 그가 양양에게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호감이 아니라, 서서히 물드는 사랑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원하는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가 웃는 모습에 같이 웃고, 그녀가 울면 함께 아파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사랑을 할 때 너무 자주 결과를 바라보지 않는가? 사랑이란 감정은 누군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행복해지는 방향으로 조용히 등을 밀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천이셩은 그것을 해냈고, 그래서 그의 사랑은 짝사랑임에도 아름다웠다.
② 말이 없어도, 마음은 들린다
청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들은 오히려 ‘대사가 없는 순간들’이었다.
영화를 보며 우리가 평소 얼마나 ‘말’에만 의존해 관계를 유지하는지 돌아보게 된다. 사랑한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 보고 싶다는 말… 하지만 그런 말보다 더 강한 건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태도와 시선, 그리고 진심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가르쳐준다.
양양과 펑은 서로의 감정을 다 표현하지 않지만,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들의 손짓 하나, 표정 하나에서 얼마나 많은 감정이 오갔는지를. ‘진짜 감정은 눈에 보인다’는 말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영화가 있을까.
③ 서툴러도, 상처가 나도, 그게 사랑이다
또 하나 깊이 와닿았던 부분은 인물들이 모두 사랑에 서툴다는 점이다. 양양은 펑을 향한 마음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고, 펑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생각하며 거리를 둔다. 천이셩 역시 감정을 품고 있으면서도 표현하지 못하고 맴돈다. 모두가 솔직하면서도 조심스럽다. 그런 모습이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사랑은 늘 확신을 갖고 시작되는 게 아니다. 때로는 불확실하고, 흔들리고, 그래서 더 간절해진다. 청설은 그 과정을 포근하게 안아준다. 누가 맞고 틀린 지를 묻지 않는다. 그저, 그 시절의 서툰 감정과 아픔이 있었기에 우리가 성장했다는 걸 말해줄 뿐이다.
④ 청춘은 한 편의 청설(聽說)처럼 흐른다
이 영화의 제목처럼, 청춘의 사랑은 마치 ‘누군가에게서 들은 이야기’처럼 아련하다. 정확한 시작도, 분명한 끝도 없이 흐르고 사라지는 감정. 하지만 그 흐름 속에 담긴 진심은 결코 작지 않다.
누군가는 마음을 전하고, 누군가는 멀어지고, 누군가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돌아선다.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이 지나고 나면, 결국 **"그때, 그런 사랑이 있었어"**라는 하나의 이야기로 남는다. 청설은 바로 그런 이야기다. 조용히, 하지만 깊게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사랑의 기억.
청설은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조용한 사랑의 결은 오히려 더 크게 울린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듣고, 기억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