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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의 짙은 감성과 음악
1990년 홍콩영화의 붐을 일으키며 세계적 유행을하던 그 감성 그대로 였다. 그 가운데 왕가위 감독은 단연 독보적인 작품들을 선보이며 홍콩 영화의 한 획을 그었다. 이 영화는 두 편의 단편 영화 [중경삼림]로 옴니버스 형식으로 꾸며냈다.
왕가위 감독은 늘 그랬듯, 이야기보다 분위기를 앞세운다. 중경삼림은 전통적인 서사 구조에서 벗어나 있다. 대신 장면 하나하나가 감정의 파편처럼 흩뿌려져, 관객은 그것들을 조용히 주워 모으게 된다. 인물의 대사는 때로 몽환적이고, 때로 너무나 일상적이다. 감정을 설명하지 않지만, 그 공백 속에 깊은 감정이 숨어 있다.
크리스토퍼 도일의 카메라워크는 이 영화를 단순한 멜로 드라마에서 예술 영화로 끌어올린다. 흐릿한 초점, 빠르게 지나가는 군중, 슬로우 모션과 빠른 셔터의 충돌… 이 모든 시도는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려는 시도다. 특히, 홍콩의 복잡하고 습한 밤거리에서 퍼져 나오는 네온사인과 노점의 소음은 영화의 정서를 더욱 선명하게 한다.
배우들의 연기는 각자의 인물에게 꼭 맞는 옷처럼 느껴진다. 금성무는 실연의 허무함을 특유의 유쾌함과 묘하게 섞어 표현하고, 임청하는 그 자체로 신비롭고도 피곤한 존재로 남는다. 반면, 양조위는 일상에 잠식된 사랑의 환상을 섬세하게 보여주며, 왕페이는 그의 세계를 흔드는 바람 같은 존재로 등장한다. 그녀의 자유로운 눈빛과 귀를 흔드는 *"California Dreamin'"*의 음악은 그 자체로 이 영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2. 우리가 아는 영화속 이야기
1부: 4월 30일, 파인애플이 유통기한을 넘기기 전
첫 번째 이야기는 금성무가 연기하는 경찰 223번 ‘무명’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여자친구에게 이별 통보를 받은 그는 실연의 충격을 잊기 위해 무언가에 매달린다. 그의 선택은 바로 파인애플 통조림이다. 여자친구가 좋아하던 파인애플. 그는 5월 1일까지 유통기한이 남은 캔을 하루에 하나씩 사들이며, 혹시 그녀가 돌아오지 않을까 기다린다. 그렇게 30통, 30일 동안 희망과 체념을 반복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는 바에 들렀다가 금발 가발을 쓰고 선글라스를 낀 정체불명의 여인을 만난다. 그녀는 마약 밀매 작전에 실패해 쫓기고 있는 인물로, 몸도 마음도 지쳐 있다. 이들은 말없이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함께 술을 마시고, 새벽의 홍콩 거리를 배회하며 서로의 존재를 느낀다. 낯선 밤, 낯선 사람에게서 느끼는 묘한 위로.
두 사람은 호텔방에서 함께 잠들지만 육체적인 접촉은 없다. 오히려, 각자의 고독과 피로를 공유하며, 서로에게 잠시 기대어 숨을 돌린다. 아침이 되자 여인은 사라지고, 경찰 223번은 파인애플 통조림들을 버리며 지난 사랑을 정리한다. 그의 마지막 대사는 단순하지만 깊은 울림을 남긴다. “사랑의 유통기한은 생각보다 짧을지도 몰라요.”
2부: 침입 아닌 위로, 스며드는 사랑
두 번째 이야기는 또 다른 경찰 663번(양조위)과 페이(왕페이)의 이야기다. 663번은 스튜어디스 여자친구와 이별한 상태지만, 여전히 그녀가 돌아올 거라 믿고 있다. 그는 집안의 물건들과 대화를 나누며 감정을 붙잡고, 잊지 않으려 애쓴다. 치약, 수건, 비누 같은 사소한 것들에 말을 걸며, 떠나간 연인의 흔적을 유지하려는 그의 모습은 쓸쓸하고도 애잔하다.
한편, 페이는 그가 자주 들르는 패스트푸드점 점원이다. 그녀는 이별 통보를 전달하기 위해 찾아온 전 여자친구에게 그가 자주 오는 시간과 습관을 듣고, 그에게 키를 건네받는다. 그러면서 그는 모르게 그의 집에 몰래 들어가 청소를 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그의 세계에 말없이 침입하지만, 그건 ‘침입’이라기보다 ‘위로’다. 페이는 그의 방을 정리하고, 어항을 바꾸고, 음악을 바꾼다. 그가 없는 사이 조용히 그의 삶을 바꾸고, 어쩌면 다시 숨 쉬게 만든다. 이 장면들엔 대사가 거의 없다. 하지만 그녀가 청소를 하는 손짓, 방안을 돌아다니는 시선, 그리고 틀어놓은 *"California Dreamin'"*의 멜로디는 그녀의 감정을 모두 말해준다.
어느 날, 663번은 그녀가 자신 몰래 집에 들어왔음을 눈치챈다. 하지만 그는 화를 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가 남긴 변화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무언의 감사와 관심을 보낸다. 페이는 그 자리를 떠나고, 둘은 한동안 멀어진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함께 떠나자는 약속을 주고받는다. 어디로 떠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의 표정에는 이제 어떤 불안도 없다. 사랑은 그렇게, 몰래 스며들어 조용히 자리를 잡는다.
3. 두 편의 이야기 하나의 사랑_감상평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사랑을 끝내고도 아무렇지 않게 다음 사랑으로 향하는 사람과, 한 사랑의 잔해 속에서 오래 머무는 사람. 영화 중경삼림은 후자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감정을 정리하는 데 서툴고, 잊는 일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그래서 더 사랑에 진심이었던 이들의 작은 시간들을 담담하게 쓸어 담는다. 처음 영화를 볼 때,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침묵’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리워하고, 잊으려 애쓰는 일은 생각보다 조용하다는 걸 영화는 잘 알고 있었다. 경찰 223번이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으며 이별을 받아들이는 방식, 663번이 욕실의 비누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 그리고 왕페이가 몰래 그의 삶에 침투해 어항을 갈고 음악을 바꾸는 그 모든 장면은 조용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온갖 감정이 겹겹이 쌓여 있다. 말보다 더 많은 말이 숨어 있다. 영화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사건이 아니라 ‘상태’로 그린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어떤 절정의 순간으로 기억한다. 고백, 포옹, 이별 같은 명확한 장면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사이사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 속에서 사랑이 어떻게 살아 있는지를 보여준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자판기 앞에서, 혼자 걷는 밤거리에 스며든 사랑. 그런 감정을 영화는 조용히 응시하고, 관객은 그 감정을 따라가며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가끔은 내가 경찰 223번 같다고 느꼈다. 누군가를 잊지 못해 의미 없는 습관을 반복하고, 캔의 유통기한을 핑계 삼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만의 방식으로 이별을 받아들이려 애쓰는 그 모습이 어딘가 낯익다. 또 때로는 왕페이처럼, 말없이 누군가의 삶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아무런 보답도 바라지 않고, 그 사람의 삶에 조금이나마 빛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그런 감정은 어쩌면 사랑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중경삼림은 사랑을 말하면서도 사랑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감정은 숨어 있고, 표현은 느리고, 인물들은 모두 망설인다. 하지만 그 망설임 속에서 더 많은 진심이 느껴진다. 우리가 진짜로 사랑할 때는 언제나 조금 어색하고, 조심스럽고, 늦기 마련이니까. 영화를 보고 난 뒤, 한참 동안 멍하니 음악을 들었다. “California Dreamin’”의 멜로디는 여전히 머릿속을 떠돌고, 홍콩의 네온사인과 습기 찬 거리의 공기감이 마음에 남아 있다. 이 영화는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한 번 본 후에야 시작되는 영화다. 각자의 기억과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관객 안에서 오래 머문다. 사랑이 떠난 자리에 남는 건 텅 빈 방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남긴 아주 사소한 흔적들이다. 냉장고 안의 주스, 욕실 거울에 비친 나, 문득 울리는 음악 한 곡. 중경삼림은 바로 그 ‘사소함의 미학’을 아름답게 포착해낸다. 그리고 말한다. "사랑은 때로,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바꿔놓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누군가를 사랑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어쩌면 다시 사랑할 용기를 조금은 불어넣어주는, 조용한 위로가 되어주는 영화. 나는 이 영화를 사랑했고, 그래서 나의 어떤 시절을 다시 사랑하게 되었다.